얼어붙은 숲 사이로 들려오는 음악의 향연속으로
0. 평점
★★★★★★★★★☆ (9/10), 말로 표현하자면 well made book.
1. 노블레스 클럽?
이 책은 로크에서 야심차게 준비중인 '노블레스 클럽' 시리즈로 출판되었다. 시리즈 자체가 장르문학의 대중화를 부르짖으며 나온, 분명한 색이 있는 레이블이기 때문에 나름 기대하고 책을 신청했었다. 특히나 이 책은 노블레스 클럽의 첫번째 책이기에, 이 책은 앞으로 노블레스 클럽이 어떤 책을 낼 것인가에 대한 예제라고 할 수 있겠다.
결과를 간단하게 요약하면... 골수 장르문학팬(이라고 하기 보다는 국내 판타지 소설에 익숙한)에게는 너무 싱겁지만 일반 대중에게는 나름 흥미롭게 다가올 수 있는 책. 정도가 되겠다.
검이나 마법이 나오는 것만이 판타지 소설이라고 정의하는 분들이라면 이 책을 판타지 소설로 분류하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느낄 수 있다. 사실 이 책에 장르문학적인 요소는 거의 들어가 있지 않으니까. 비율로 따지자면 10% 정도? 비슷한 느낌의 책이라면 '향수' 정도가 있겠다. 대신 이런 특징은 어떤 면에서는 일반 대중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장점을 마련하는데 일반적인 판타지 독자가 알아야 할 기본 개념들 - 오크, 파이어볼, 마나 등등등 에 대한 이해가 전혀 필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있다. 장르문학을 사서 보는 팬들에게는 밍숭맹숭하고, 일반 소설 독자를 끌어당기기에는 레이블 자체가 낯설다. 과연 노블레스 클럽은 어떻게 될까? 결과는 순전히 얼음나무 숲의 파워에 달려있다.
2. 책 자체
책 자체는 약간 두꺼운 편이다. 일단 돈이 아까운 수준은 되지 않을 뿐더러, 표지나 중간중간 소제목에 삽입된 삽화들은 '얼음 숲'의 느낌을 충실히 살리고 있다. 전체적으로 고급스러운 느낌이다. 책장에 꽃아놓을 수 있는 책이라는 말 그대로, 두껍긴 하지만 단권으로 끝나며 표지는 수수하지만 세련된 느낌을 준다. 어설프게 캐릭터를 그리거나 화려한 색상을 채택하지 않은 것이 더더욱 순문학에 가깝다는 느낌을 준다.
3. 감상
이 책은 '아나토제 바옐' 이라는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를 관찰하는 '고요 드 모르페'의 눈으로 서술되어 있다. 중세시대의 분위기를 모방한 파스텔톤의 배경속, 얼핏 아마데우스와도 비견됨직한 주인공은 아마데우스와는 달리 바옐을 열렬히 추종하는 추종자로 등장한다. 그의 음악을 이해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간절한 소망을 가진 주인공으로 말이다.
주된 두가지 흐름의 갈등 - 자신의 음악을 이해해줄 사람을 찾고 있는 아나토제 바옐과 그의 지음知音이 되고 싶어하는 고요 드 모르페의 갈등 구조는 기존 장르문학 독자에게는 너무 밋밋한 감이 없잖아 있다. 하지만 장르문학과 친숙하지 않은 분들께는 (책을 가리지 않고 읽는 터라 아마 맞으리라 생각됩니다) 충분히 자극적인 글이리라 생각된다. 아마 특정 취향(B?)의 여자분들께서 좋아할만한 구도이긴 하다.
이런 류(희대의 천재가 등장하는)의 공통적인 숙제는 독자에게 등장인물이 얼마나 천재인지를 묘사하는데 있는데, 음악에 대한 묘사가 꽤나 잘 되어 있어서 천재성의 일부나마 느끼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신의 물방울이나 피아노의 숲 같은 만화책처럼 음악을 듣고 떠오르는 심상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들으면서 생기는 감정의 변화 위주로 서술되어 있다. 담백한 서술임에도 불구하고 천재의 음악이라는 공감을 이끌어 내는것은 분명 작가의 필력일터. 예시를 하나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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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끝남과 동시에 여명에서 찬란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음音의 형태를 하고 있는 날 선 울부짖음이었다. 이 안에서 슬퍼하는 척하며 태연히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살인자를 향해 던지는 바옐의 극렬한 앙갚음.
숨이 막혀왔다. 절절하게 울리다가 어느 순간 반짝하고 심장을 긁고 지나가는, 지나치게 고통스럽고 지나치게 황홀한 바이올린 소리. 그것은 이 자리에서 듣는 모든 이들의 가슴을 헤집었다.
범인이 누구든, 여기있는 자이든 아니든, 틀림없이 이 음악을 그를 부수고야 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너무나도 감미로운 복수였다. 아마 내가 그 범인이라면 절정의 행복감을 느끼며 나 자신을 죽일 것이다.
그것은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던, 모든 사람들의 호흡을 곤란하게 만드는, 그리고 마지막에는 듣는 이의 숨마저 멎게 하는, 그런 음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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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묘사하는 또 다른 방식으로, 천재의 음악을 갈구하는 사람들의 광기를 제시했다. 향수에서 주인공의 향수에 취해 벌이는 광기와는 비교도 안될정도로, 바옐의 음악을 갈구하는 사람들에 대한 묘사는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자기의 자식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진혼곡을 들으리란 기대로 즐거워 하는 아버지가 있는 마당에야!
적막으로 스산한 얼음나무 숲, 그 속에서 울려퍼지는 음악. 그리고 광기. 이 세가지가 이 소설을 규정짓기 때문에 스토리보다는 인물의 내면 묘사가 더욱 섬세하게 다가온다. 작가분이 여성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묘사가 매우 섬세한 편인데(그 덕분인지 주인공이 왠지 여자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래식을 묘사하다보니 묘사에 대한 한계가 존재한다. 아마 클래식을 많이 접해보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점인지, 음 자체를 묘사하지 않아서인지... 왠지 음악에 대한 묘사를 들으면서도 적당한 음악이 머리속에 떠오르지 않아 완벽한 몰입까지는 가지 못했다. 맛있는 음식의 묘사를 들으면 그에 해당하는 맛이 떠오르며 먹고 싶은 마음이 들어야 하는데, 그냥 '혀가 살살 녹을정도로 맛있는' 이런 정도의 장황하고 화려하지만 알맹이는 없는 묘사를 듣는 기분이었다.
이런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간만에 보는 수작중 하나라고 본다. 재미 여부를 떠나서 잘 쓴 글임에는 틀림없고, 장르문학 독자를 끌어들이지는 못할망정 지루하다고 느껴질 글은 아니니까. 다른 출판사와는 다른 전략으로 시작하는 로크. 로크의 시도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됬으면 한다.
Written by 風月樓主